
안녕하세요.
나이 많고 경력도 애매한 시기에 일을 관둬버려 미래가 불안정하고 걱정되는 여자입니다.
라고 상사가 나를 묘사해서 이렇게 소개해봤다.
어쨌든 나는 퇴사를 했다.
워낙 업계가 좁은탓에 자세히는 말할 순 없고.. 그냥 방송 쪽 일을 했다.
전 직장까지 합치면 2년 정도 했다.
음..솔직히 일반적인 노동시간으로 따지면 남들보다 2-3배 일했으니
대충 정신적으론 4년 경력이라고 쳐도 무방할 것 같다.ㅎ (진지하게 말하는 거임
몇 개월은 포괄임금제 계약직으로 일하고, 몇 개월은 개인사업자 프리랜서로 일하고,
직장이 바뀌면서 또 몇개월은 포괄 계약직이었다.
그리고 관뒀다.
와중에 계약방식 때문에 첫번째와 두번째 직장 사이에 실업급여도 못받았고,
이번에도 못받을 것 같다.
이번엔 자진퇴사지만 받을 수 있는 조건에 참... 부합하는데
(병 진단서 6개월 이상+병가 신청했음에도 안됨, 초과 근무)
이걸 증명할 길이 없더라 ㅋㅋㅋㅋ ㅋ ㅋ ㅋ tlqkf.
누군가가 보기엔 나이도 꽤 쳐먹고 공채 써서 안정적인 자리를 가질 생각은 안하고
못버티고 나와서 미래 생각도 안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일단 퇴사하는 이유를 딱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이다.
일을 하기 싫어서도 아니고, 힘듦을 참지 못해서도 아니고, 놀고 싶어서도 아니고
정말 나는 이렇게 살기 싫기 때문에 관뒀다.
나이, 경력, 미래, 안정적인 환경 등등 나를 걸고 넘어지는 모든 방지턱은 솔직히 나한텐 브레이크가 되질 않는다.
애초에 나는 일을 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일이 필요한 것 뿐이다.
음... 더 자세히 말하기 이전에, 일단 퇴사 선언을 하는 날을 그냥 얘기해보겠음
퇴사를 말하기 까지 솔직히 몇 주가 걸렸다.
난 워낙 이런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학생때ㅋㅋㅋ 알바할 때 그만둔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어서 몇개월을 더 일하던 사람이다.
지금은 좀 덜한편이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이유더라도
나로 인해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참을 수 없이 불편했다.
그래서 누군가 부탁을 하면 내가 피해를 보는 상황이어도 거절을 잘 못했다.
어쨌든, 이런 기질 때문에 말하기 까지 오래 걸린 것도 있고..
솔직히 진짜 그냥 고민을 많이했다. 1년은 당연히 버티자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고,
한 작품을 시작을 했으면 그 작품은 끝내고 관두자 라는 생각이 당연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이.. 일의 특성상 고정 세트 좀 지어놓으면 일이 좀 덜 빡세지는 시기가 찾아오기도 했고. (덜 빡센거지 안빡센건아님)
조금만 참으면 계약이 끝날 때까진 버틸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뭐.. 결국 그럴 컨디션이 되질 않았고
정말 예의상ㅋㅋ 야외 큰 구다리도 끝나고 메인 고정세트를 다 짓고나서 감독님한테 말하러 갔다.
감독님은 이렇게 말했다.
"너가 이렇게 나가면 나는 어떡하니 내 생각을 해줘"
"내일 까지만 한 번 더 생각해줘"
"솔직히 난 너의 이런이런점이 싫었는데 이제 알아가는 중이었어"
"내가 이제 병원도 잘 보내줄게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쉬게 해줄게"
"너 이제 나이도 있는데 어떡하려고 그러니"
그리고 나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마쳤다고 했다.
퇴사의 가장 큰 이유는 아까 말했듯이 >이렇게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이렇게'가 뭔지 나불거려보겠다.
나는 정신과치료를 받으면서 항우울제 항불안제를 처방받아 먹은지 3년? 정도가 되었다. 맞나? 사실 모르겠다.
의사가 약의 양이 적진 않다고했다.
그런만큼 갑자기 약을 중단하거나, 안먹다가 갑자기 먹거나하면 몸에 바로 이상증상이 온다.
갑자기 약을 중단하면 머리가 버티기 힘들정도로 어지럽기 시작한다.
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휘청거리거나 도중에 주저 앉아서 쉴 정도로 어지럽다.
일하면서도 거의 10초에 한번씩 머리가 쿡쿡 쑤신다.
이게 좀 괜찮아질때까지 2주는 간다.
그리고 그러다가 갑자기 약을 처방받아 먹으면 구토를 응급실에 가야할 정도로 끊임없이 한다.
이 일을 하면서 병원을 가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사실 현재 나는 약만 매일 먹으면 전혀 문제가 없는 상태다.
그러나 병원을 하다못해 2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안되면 토요일에라도 가면 됐는데,
감독은 주말에 당연하다는 듯이 출근을 시켰다.
내일 주말인데 출근해도 괜찮냐는, 나의 일정을 묻는 질문은 단 한번도 없었다.
7월에는 20일 연속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출근했던 적이 있다.
약도 다 떨어졌고, 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지쳐있었다.
이러다 진짜 x되겠다 싶어서 오전반차라도 써서 (야근을 하기 위해 오후반차는 쓸 생각도 못했다) 병원을 가기로하고,
금요일날 감독님에게 다음주 월요일에 오전반차를 써도 되느냐고 물었다.
물론 업무일정을 다 고려해서 정한 날짜였다.
감독님은 잠깐 말이 없더니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와 근데 mz는 진짜 mz다. 나 때는 일 할때 반차같은거 쓸 생각도 못했는데"
말문이 막힌다는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원래 병원간다고도 말을 안하려다가, 나도 모르게 너무나도 욱했는지 억울했는지, 병원을 가는 것이라고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감독님은 바로 왜 가냐, 어느 병원을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위가 아파서 내과를 간다고 말했다.
차마 당신같은 사람들 때문에 항우울제를 받으러 간다고는 못했다.
이 일의 특성상, 주말 출근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전직장과는 다르게 이곳은 주말출근을 하면 당연히 받는 대체휴가랄게 없었다.
애초에 출퇴근 카운트도 안되는 곳인데 감독 재량인 것이다.
그러나 저렇게 오전반차 하나에 저런 극딜을 받고나니
10월에 잡아놓은 비행기표가 생각이 났고,
그때 내게 있는 3일짜리 여름 휴가를 쓰겠다고 말하고나서의 재앙이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3달 뒤 3일 휴가를 말하기가 무서워서 덜덜 떠는 내 모습이 너무 거지같았다.
감독님은 나를 mz라고 불렀다.
요즘 미디어에서 밈으로 흔히 쓰이는 맑눈광, mz의 모습들은 전혀 내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거리가 멀었다. 사회에선 나는 젊은 꼰대마냥 윗사람들을 대했다.
나는 단순히 >집에 가고 싶어하는< 오해 때문에 감독한테 mz 수식어가 붙여졌다.
입사 초반엔 정말 야근할 이유가 없었다. 일 거리도 없었다.
그렇기때문에 6시가 되면 내 근무 시간은 끝이었다.
그럼 그냥 들어가보겠습니다. 하고 가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감독님을 굳이 신경써준답시고, 자리로 찾아가서
혹시 더 도와드릴 거 없을까요? 라고 일부러 꼬박꼬박 여쭤보고 퇴근을 했다.
그리고 같은 팀 동료가 감독님이 별다른 말을 안하면 퇴근하겠다고 말하는걸 어려워하는 듯 했다.
그래서 겸사겸사 내가 앞장서서 말하러 가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한두달이 지나고, 어느 날은 할 일이 있어서 야근을 하는데 감독님이 내게 말했다.
"너 야근하는 거 싫어하면서 어쩐일로 야근을 하네?"
여기서부터 ㅈ댐을 감지했다.
도와드릴 거 없냐고 묻고 집에 가는 것은, 내가 집에 빨리 가고 싶기 때문에 물어보는 것으로 보여졌던 것이다.
그냥 감독이 자리에 있으면 닥치고 함께 야근을 하는 것이 정답이었던 것이다..
이후로 뭐만하면 집에 가고 싶어서 그러지? 집에 빨리 가고싶지? 등등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나에게 mz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본인이 만든 프레임에 나를 가두기 시작했다.
진짜 뭐만하면 이상한 걸로 트집잡아서 나보고 mz라고 했다.
하...너무 많아서 이제 기억도 잘 나질 않는다.
나열하기도 기빨린다.
퇴사 선언을 하고나서 한 달 내내 한 번만 더 생각해보라며 붙잡혔다.
겠냐고요. 이미 수만 번 생각하고 말한 겁니다.
그리고 감독은 대놓고 나를 퇴사할 때까지 빨아 먹겠다고 말하더라.
내가 확실히 나갈 거란걸 감지하고 나서는 정말 일이 많아졌다.
주말출근도 안시킬게, 병원도 보내줄게, 하더니만 당연히 다시 주말 출근을 시키고.
진짜 별것도 아닌데 귀찮은 일들을 전부 내게 던졌다.
쩔 수 없는 노예인 나는 다 했지만..
퇴사 전 주의 주말에는 리허설이 있었다.
다른 세트 촬영이 끝나고 리허설이 예정이었기에, 정확한 시간 공지가 없었고,
나는 그냥 스케줄을 보고 대충 가늠해서 저녁즈음이겠거니 했다.
(사실 이 일의 이러한 사이클도 너무 스트레스다)
그리고 나는 그 가늠보다 자발적으로 더 일찍 회사를 갔다. 혹시 모르니까.
마침 감독도 나와 비슷하게 도착한 상태였고, 우리는 세트를 한 번 둘러본 다음에 사무실로 갔다.
그 때 연출팀에게서 '리허설을 밤10시 쯤 들어갈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시간이 생각보다 상당히 떠버렸고, 감독은 이렇게까지 늦을줄은 몰랐는데 어떡하지~ 하길래,
그냥 가벼운 말로, 넷플릭스 보면서 기다리는 거 어떻냐고 말했다.
이 일의 특성상 생활 레퍼런스의 느낌으로 일하면서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보기도 하고,
심지어 주말 출근에 정식으로 일하러 나온 날도 아니라서 한 말이었다.
그랬더니 예전에 자기 후배가 넷플을 보면서 일하는 걸 혼낸 썰을 말하면서
"일 찾아서 줄게 일이나 하자"
라고 하는 거다.
그러고 꾸역꾸역 별 것도 아닌 일을 찾아서 나에게 던졌다.
웃기는 마라탕이다.
와중에 본인은 맨날 넷플 보면서 일한다. (심지어 영화 드라마 아니고 그냥 연애 예능 이런거 ㅋㅋ
뭐 이건 그렇다치고..
자발적으로 성실하게 주말에 나왔다가 아무렇지 않게 일을 받아서 하는 나의 모습이 참 씁쓸했다.
난 최고로 가성비 좋은 직원인 듯 싶었다.
어쨌든..
이런저런 어쩌구저쩌구 하여 퇴사했다.
사실 이번 직장이 처음이었으면 1년, 2년을 어떻게든 버텼을 수도 있다.
처음이 아니라 두번째였기 때문에 오히려 이렇게 도망칠 수 있었다.
이 직종과 나의 미래에 대한 고민의 답을 확실하게 얻었기 때문이다.
이 분야는 답이 없다.
영화 쪽은 내가 해보질 않아서 뭐라 못하겠지만.. 여하튼,
방송이라는 것 자체의 특성이 너무나도 진하고 고여서 썩어가지고 바뀌지 않는다.
설령 10년, 20년 뒤에 지금의 윗사람들이 가고 우리 세대가 감독이 되는 시기가 찾아와도,
우리가 우리 후배에게 어떻게든 잘 해줄 수는 있겠지만,
이 업계 자체의 썩은 특성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애초에 세트 제작 방식부터가 몇십년 째 바뀌지 않고 있다.
그나마 디자인 툴이 생기고 스케치업 3d 시안이 나오고 도면이 디지털화 되었긴 하지만..
엔스케이프의 활용과 같이 좀더 효과적인 시안을 보여줄 수 있는 노예로 발전한 것 뿐이다.
프로세스와 실제 제작 과정은 바뀌지 않는다.
VFX 스튜디오와 같은 것들이 더더욱 발전하여 제작방식에 큰 변화가 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금 우리 세대가 힘들어하는 지점을 해결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 개인적으로 가치관과 맞지 않는 점은
폐기물이 너무나도 많이 나온다.
하나의 작품을 위해 고정세트, 전환세트, 야외세팅을 진행 하면서 수많은 공간과 제작물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촬영이 끝나면 이 모든 것들은 영상으로 남겨지고,
영상을 위해 만들어졌던 가짜 공간들과 제작물들은 곧바로 폐기물이 된다.
몇천만원 들여 마감한 고급 인테리어 타일은 그대로 쓰레기가 되어 버려진다.
실사실은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가동하고, 거기서 나온 수많은 출력물은 한 번 쓰고 버려진다.
수많은 합판, 목재, 필름, 유리, 소품 모든 것들이 한 작품이 끝나면 몇 시간만에 부셔져서 버려진다.
이러한 것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이 만들어지고 버려지고 있을까.
나는 어쩌면 실제로는 대형 쓰레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일을 하고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문득.. 자주 들었다.
우선 당장은 뇌를 세척하는 기간을 갖기로 했다.
그러고나서 안정적인 상태에서, 이성적으로 사고하며 미래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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