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알베르 카뮈]
읽었던 책인데 문득 생각나서 다시 읽었다.
사실 생각난 계기는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본 글 때문이었다.
'엄마 장례식 발인 끝나고 헬스장 가서 운동을 하고 왔는데 친구가 싸패라고 욕하더라'
라는 글이었다.
그리고 댓글에선 패륜아다, 싸패 맞다, 소시오패스다, 실감이 안 나서 저러는 거다 등등
별의별 말들이 오갔다.
이방인을 읽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 책을 떠올렸을 법했다.ㅋㅋㅋㅋ
물론 이방인 리뷰에서조차 주인공인 뫼르소가 미친놈 소시오패스다.. 라는 말들이 많긴 하지만..
게다가 뫼르소가 사형을 당한 이유를 곧이곧대로 말하면서 저 글의 글쓴이도 역시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보통 이방인은 실존주의 철학적 관점에서 많이 해석이 되긴 하는데
일단 그보다는 그냥..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내 생각 위주로 기록해 두는 글
애초에 카뮈 스스로가 실존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기도 함
(하지만 내 생각에 자연스레 실존주의적 관점이 녹아있을 순 있음ㅎ)
-
1. 효(孝)와 이방인의 감정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아마 어제였으리라."
책의 1부는 뫼르소의 엄마가 죽었다는 통보를 받고 장례식을 치르는 걸로 시작한다.
뫼르소는 슬퍼하지 않아 '보인다.'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마지막으로 엄마의 얼굴을 보겠느냐는 말에 보지 않겠다고 하고,
관 앞에서 밤을 새우며 밀크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엄마의 나이가 어떻게 되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장례를 마친 다음 날, 오랜만에 우연히 재회한 마리라는 여성과 데이트를 하게 된다.
책의 2부에서는 살인을 저지른 뫼르소의 재판과정이 나온다.
그리고 재판에서는 뫼르소가 누굴 어떻게 왜 죽였느냐는 이야기보다,
뫼르소가 과거 본인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슬퍼하지 않았고, 바로 다음 날 코미디영화를 보고 데이트를 했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춰지며 비난을 받고, 결국 사형 판결까지 이르게 된다.
재판에서 뫼르소의 변호인은 말한다.
"도대체 피고인은 어머니를 매장했기 때문에 기소된 겁니까,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기소된 겁니까?"
그러자 방청객들은 웃었고, 검사는 말한다.
“저는 이 사람이 범죄자의 가슴으로 어머니를 매장했기 때문에 유죄를 주장하는 바입니다.”
일단 나는 스스로가 이방인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꼈을 때가
'나는 불효자식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인정했을 때였다.
사회적으로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도리라고 생각하는 절대적인 무언가를 등져버린 순간
나는 이방인이 되었다.
책에서는 재판장에서 뫼르소의 '이방인'같은 느낌이 아주 잘 드러난다.
살인죄로 재판에 서게 된 뫼르소는 정작 본인의 참여 없이, 본인 의견의 청취 없이 운명이 결정되고 있음을 느낀다.
뫼르소는 가만히 있고, 사람들은 그의 엄마를 향해 보였던 행동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그를 단죄한다.
>심지어 살해당한 아랍인과 관련된 입장 측은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뫼르소가 사형당하는 진정한 이유는 살인이 아니라, 기성질서와 고정관념의 위배에 있다.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사회 정서상 '효'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된 사례들이나 사람들의 태도를 볼 때 종종... 아니 자주 '부조리'를 느낀다.
부조리라는 단어가 내 생각과 완전히 대응되는 건 아니지만.. 이다음에 부조리 자체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기 때문에 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족이라는 관계도와 사랑이라는 감정의 위치가 역전이 되어버린 것 같다.
부모의 지속적인 학대에 끝내 부모를 살해하는 존속살인 뉴스에는 여전히 꼭 나오는 말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부모님한테 그럴 수 있냐'
물론 당연히 살인 자체를 정당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저 말 한마디로, 분명히 '학대'라는 개인적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관계적 사실 하나에 모든 도덕적 기준이 역전되면서 당사자는 '소외'된다.
이방인을 다시 읽게 되었던 저 인터넷 글도 똑같다.
온라인 재판장에서 글쓴이를 심판하러 온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당연한 도덕적 기준'으로 패륜아라고 칭한다.
아무도 글쓴이와 엄마의 정서적 관계가 어떤지,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등
개인적 상황, 삶, 감정에 대해선 진심으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10줄도 되지 않는 글에서 인식되는 글쓴이의 단어, 말투, 태도로 100줄 이상의 토론을 펼치고,
거의 내 눈에는 종교적 믿음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가족애에 대한 사회적 기준의 믿음에서 글쓴이는 이미 소외되었다.
나는 저 글을 보자마자 '이것만 보고 내가 무언가를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닌데?'라는 생각만 들었었다.
가정폭력 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면서 이에 관한 법률도 제정되고 있긴 하지만
관련된 문화 지체 현상은 여전하며,
'효'라는 게.. 정말 우리 dna에 너무 뿌리 깊게 박혀있는 것만 같았다.
심청전의 심청이를 보고 배우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며 자란 우리는
유치원과 학교에 가서 어버이날에 엄마아빠 사랑해요라는 카네이션을 만들고
수련회에선 다 같이 촛불 켜놓고 부모님 얘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고
가족 이야기를 담은 가족신문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오라고도 한다.
가족의 형태의 다양성조차 고려되지 않는 와중에 개인적 사정 따위 고려될 리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연스레 '가족이니까', '가족이라면 당연하지'의 기준으로 말을 하곤 한다.
난 절대 부모자식 간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말하려는 게 아니다.
가족이니까-라고 당연히 말하기 이전에,
그 애착과 사랑이 형성되는 과정이 개개인에게 어떤 식으로 존재하냐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뿐이다.
물론.. 그 관계에서 발달되는 사랑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이긴 하다.
그래도! 나는 순서가 역전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역전으로 인해 생기는 편견에 가끔은 속이 메슥거리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이 든 시점에서 나는 이미 이방인이 된 셈이었다.
아동학대에 관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내가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어떻게 본인 배로 낳은 자기 자식한테 저럴 수가 있어'
로 시작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세상에 낳아져서 자기 부모밖에 모를 애한테' ,
'가족관계에 묶여서 도망칠 수도 없는 힘없는 아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로 시작한다.
내가 엄마 뱃속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엄마와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동시에, 부모님이 나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한 마디만 해준다면
무엇이든지 용서가 될 거 같다는 막연한 감정이 어쩔 수 없이 드는 자식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가족 관계에서 부조리함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부정하게 된다.
분명히 내가 크게 상처받은 것도 맞고,
있는 힘껏 노력해서 대화하려 했으나 결국 통하지 않음을 깨닫고 포기하게 된 것도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통 가족한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맞나?'
라는 생각부터 들게 된다.
그렇게 학습되었으니까.
그리고 보통 이해받지 못한 사람이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래서 난 그냥 내가 불효자식이라고 인정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달라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금 해방된 기분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는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고 한들,
누군가가 내게 엄마가 죽어서 슬프냐고 묻는다면,
뭐랄까 어렵고 난처한 감정이 든다라고 말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이고, 누군가에게 받을 단죄에서 그 죄를 덜기 위한 거짓말을 할 생각도 없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에서 엄마는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욕망이 일었음이 틀림없었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로 인해 눈물을 흘릴 권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2. '부조리'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
부조리의 사전적 의미는
'이치에 맞지 아니하거나 도리에 어긋남'
그리고 이방인의 작가인 알베르 카뮈가 말하는 철학적 관점에서의 부조리란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 '인생에서 의의를 발견할 가망이 없음'을 뜻한다.
부조리한 감정은 애초에 합리적인 추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아연한 감정이다.
코스모스가 카오스의 부분집합이듯, 합리는 부조리의 부분집합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삶과 죽음에 있어서 인간은 논리적, 합리적으로 정답을 찾고자 하지만
그냥 여기 존재할 뿐인 세계와 그 의식은 결국 충돌하게 되고, 부조리 감정이 탄생한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부조리를 의식하고 말하는 인간이다.
'태양' 때문에 방아쇠를 당겨 뫼르소는 살인을 저지른다.
그걸 본 우리는 뫼르소의 살인 '의사'와 살인 '결과' 사이에서 죄의 애매성을 느낀다.
그리고 재판과정을 따라가면서,
뫼르소와 엄마의 관계에만 주목하는 사람들, 뫼르소에게 회개를 권하는 사제의 모습 속에서 (이때 뫼르소 캐릭터로선 상상할 수 없었던 반항적 폭발이 인상적임)
오히려 더 큰 부조리들을 인식할 수 있다.
뫼르소는 감형을 위한 회개와 거짓말을 끝까지 하지 않고 사형 선고를 받는다.
어디선 자살과 같은 사형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뫼르소는 애매성 속에서 진실만을 말한다.
그 속에서 '태양'은 '본질'에 비유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뫼르소를 보며 사람들은 비웃는다.
현대의 독자들은 그를 감정이 결여된 소시오패스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 판단 기준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 순간 나는 같은 세계 사람들끼리 있어 모두가 행복한 클럽에서처럼
모든 사람이 서로 만나고, 부르고,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
그제야 나는 왜 내가 다소 침입자 같고 남아도는 존재 같다는 기묘한 인상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속에서 부조리한 감정을 깨닫는 순간 엄청난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니 살아야 할 이유도 모르겠다는 감정이 들게 된다.
이전 글에서 내가 느꼈던 허무함에 대한 생각을 썼었다.
'허무함'은 결과적이다. 움직이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멈춰 있는 끝에 있다.
나에게 허무함이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내 뇌를 아무것도 없는 무의 가상공간에 던져 놓는 것과 다름없어서
어떠한 일의 원동력이 전혀 만들어지지 않게 된다.
여기서 나는 딱히 답을 찾지 못했었다.
그러나 카뮈는 이런 부조리한 삶에 “반항”하라고 말한다.
카뮈는 또 다른 소설 [시시포스 신화]에서 부조리에 직면한 인간이 살아가야 할 방향성을 말해준다.
소설 속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일을 방해한 죄로 거대한 바위를 뾰족한 산 정상에 들어 올리는 벌을 받는다.
고통스럽게 거대한 바위를 뾰족한 산 정상에 올리는 순간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벗어날 수 없는 불합리한 일, 실현불가능한 일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다.
이 모습은 부조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으로도 해석된다.
"이때 반항의 개념이 등장한다.
어느 날 시시포스의 의식은 고통스러운 이 일을 깊이 성찰하면서 의미를, 행복을 찾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는 열성을 다해 바위를 밀어 올리며, 마침내 그것을 산정에 올려놓는 순간
자신의 노고에 한없는 자부심을 느낀다."
- <이방인 ; 해제 - 유기환>에서 -
즉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것을 고통이 아니라 행복의 원천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벌을 내린 제우스에게 제기하는 최고의 반항인 것이다.
부조리한 감정을 느끼고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결과”가 되어선 안된다.
오히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인정과 절망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한다.
카뮈에 의하면 부조리는 인간의 숙명이다.
세계는 도덕과 배덕, 긍정과 부정, 고통과 기쁨 등 반대되는 두 항의 양립에 바탕을 둔다.
두 항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하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자살은 부조리의 한쪽 항인 인간의 의식을 말살하는 것이기에 해결책이 아니다.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나의 삶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는 있다.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부조리함에 대한 반항이기 때문이다.
나는 부조리한 이 세상 속으로 원치 않게 던져졌다.
나 또한 애매함과 불완전함으로 뭉쳐진 인간이다.
그런 내가 처절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며 답을 찾게 되는 길이다.
답을 찾지 못해도 괜찮다. 애초에 부조리한 세상에 정해진 답이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내 성격대로 말하자면
이딴 세상에 태어난 것도 황당한데 차라리 빠르게 좆같음을 인정하고
부조리함에 뻐큐 하며 보란 듯이 행복을 찾는 반항하는 삶을 사는 게 더 괜찮지 않나?^_^
물론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반항과 고독 속에서 지칠 수 있다. 우선 당장 내가 그렇다.ㅋㅋ
하지만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함께 이겨낼 수 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사랑이다. (사랑무새라고 했지 내가)
우리는 이미 모두 사형선고를 받은 몸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뫼르소는 '사회적' 사형선고의 끝에서 ‘반항’ 하고 삶의 의지를 느꼈다.
"나는 그렇기는 하지만, 실은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삶의 변화에 관심이 없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그 누구도 결코 삶을 바꿀 수 없고, 결국 이런 삶이나 저런 삶이나 똑같은 가치를 지니며,
지금 여기의 내 삶이 전혀 싫지 않다고 대답했다."
우연의 사건들과 결과에 삶을 맡겨 버리는 것은 사회적 사형선고로 이어진다.
태어나는 동시에 모두에게 주어진 사형선고를 인정하고, 반항하면서 처절하게 살아가야 한다.
'반항'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사형보다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진실로 흥미진진한 유일한 일이라는 사실을 어째서 몰랐단 말인가!
언젠가 이 감옥에서 나간다면, 나는 모든 사형 집행을 빠짐없이 보러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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