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각

서양 철학사 후루룩

by 라라쿠쿠 2023. 4. 10.

 

"집요하고 정교한 논의는 자신의 아픔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펼쳐지곤 한다.
철학의 이론들도 그렇다.
사상의 모든 논의들은 철학자들이 자신과 자기 시대의 문제를 깎고 다듬으며 해결해 가는 가운데서 나왔다.
왜 그랬는지를 알면 이해의 실마리가 잡히는 법이다."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 안광복] 읽고나서
책 리뷰라기 보단 읽으면서 든 생각 주절주절 글..
우선 내가 요즘 들어 유독 철학 책을 읽게 된 이유가 있다.
 
나의 가치관이나 삶에 대한 태도를 이미 있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허무주의, 염세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정확한 사건이나 계기들은 잘 모르겠고, 성인이 된 후에 문득 나는 이런 태도로 살고 있구나 하고 자각했다.
어느샌가 그렇게 가치관이 만들어져 있었다.

지금은 낙관적 허무주의에 가깝다.

 


깨닫게 된 건 휴학을 했을 때였다.
살면서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서 생각만 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자려고 누우면 기본 5시간은 생각하며 뒤척일 때가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노트에 글을 쓴 적도 있었으나 쓸 말이 너무 많아서 손이 아파 금방 관뒀었다.
상담을 받으면서 그동안 참아왔던 말과 감정을 쏟아낸 적도 많았다.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허무함이었다ㅎㅎ
 
최근에는 저 때만큼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다. 생각하기를 조금 포기했었다고 할까..?
상담을 받을 때에도 전에는 물 만난 물고기였다면 지금은 그저 탈수인간이다.
10대까지는 높은 기대와 희망으로 뇌가 움직였다면
20대 중반까지는 실망감으로 우울해하고 화를 냈고
그 후로 지금까지는 무의미 무기력 투성이로 지냈다.
 
그런데 문득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너무 꼴사나운 거다. (많이 순화해서 표현함
어떤 부분이 꼴사납냐면, 순간순간 찾아오는 쾌락과 행복은 무지성으로 즐길 대로 즐기면서
뒤돌아서자마자 허무함을 느끼면서 입에 죽고 싶다를 달고 사는게 갑자기 존나 꼴사나웠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알고 있던 유일한 사실은 '자신이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였다.
당연히 나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왜 이러고 사는 건지 정도는 이해하고 싶었다.
 
'허무함'은 결과적이다. 움직이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멈춰 있는 끝에 있다.
나에게 허무함이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내 뇌를 아무 것도 없는 무의 가상공간에 던져 놓는 것과 다름없어서
어떠한 일의 원동력이 전혀 만들어지지 않게 된다.
어쨌든 지금 나는 살고 있는 과정에 서있고, 당장 죽겠다는 끝도 못 보겠다면 납득할 때까지 파고드는 게 내 기질이다.
그런데 그 기질을 아예 무시하고 있으니 정말 껍데기만 살아있는 기분이었다ㅎ..
 
철학 이론들은 그 사람들의 삶과 시대에 밀접하다. 그리고 그 삶들은 전부 다 다르다.
서로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냥 어쩌구 저쩌구 해서 그랬어' 하고 막연하게 툭 뱉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근거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증명해 보이려 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래서 지금의 내 생각에 다양한 양분을 좀 얻고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일단은 철학 이론들을 한 번에 살펴보고 그중에서 파고들만한 이론을 고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해서 기록해 두는 이유는
책에서 대신 잘 설명해 준다.
 
"연륜이 곧 현명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각 연령대마다 나름의 지혜가 있는 법이다.
나는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의 내가 내린 판단을 존중하려 한다.
...
세월을 잣대로 들이밀며 젊은 시절의 나를 폄하하고픈 생각은 없다."
 
 
 
 
-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든 생각인데,
결국 종교적인 '신'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는 걸까?
물론 그냥 똑 하고 뗄 수 없는 요소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이 지금처럼 발달하기 이전에, 태어나서부터 종교와 뗄 수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신이라는 것을 아예 배제한 관점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건가?
몇 백 년의 시간 동안의 철학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 증명하고자 논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몇몇 철학자들은 단지 '무신론자'의 사상 같다는 이유 하나로 비난받고는 했다.
  
흠 아마도 난 오래전에 태어났으면 파문당하고도 남았을 듯
 
 
"종교도 세상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해답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철학은 주장을 내놓는 데 그치지 않는다. 논리와 합리적인 근거에 비추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보이려 한다.
이 점에서 철학은 종교와 다르다.
종교는 ‘신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라고 선언해 버리고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권하지만,
철학에서는 받아들일 만한 합리적인 설명이 없으면 어떤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종교나 신앙에 거부감인지 거북함인지를 느끼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약간 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어린 시절부터
납득할만한 근거, 합리적인 이유가 없으면 갸우뚱하는 기질이었음
어릴 때부터 '왜요?'를 달고 살았고
어른들한테 '그냥 해' '그냥 그런 거야' 라는 말을 들으면 금쪽이 모드 on 됨ㅋㅋㅋ
 
자연스럽게 고등학생 때는 이과를 선택했다.
과학이 좋았다. 일단 교과과정에서 배우는 것들은 다 고개가 끄덕여졌고,
원리 하나를 이해하면 굳이 무언가를 억지로 외우지 않아도 응용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왜요?' 라고 물으면 반드시 논리적인 이유가 돌아왔다.
어쩌다 이해를 하지 못하더라도 관찰과 실험의 결과에서 오는 사실들이 친절하게 이해를 시켜줬다.
 
흠 근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철저히 무교.. 스러운 환경에서 컸냐 하면 절대 아니다.
일단 우리 집안 자체는 불교다.
뭔가 행사 같은 거에 꼬박꼬박 참여한다거나, 주기적으로 간다거나 하진 않아서..
불교라고 딱 잘라 말하기엔 또 애매하긴 하지만, 확실한 건 그 외 종교들은 절대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부모님이나 할머니가) 무언가 기도를 하고 싶을 때나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을 때 절을 찾게 된다는 것? 이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절'이라는 공간 자체는 좋아하게 되었고
뭐.. 누군가 묻는다면 무교라고는 하지만 어쩌다 간절히 바라는 게 있었을 때
'거기 뭐 부처님 하나님 등등 혹시 지금 어딘가에 존재해서 듣고 계신다면요~'
라고 밑밥 깔고 기도하던 사람이다. ㅋㅋㅋㅋㅋㅋ
 
(뒤에 더 계속 말할 거지만 난 이런 의미에선 신이 있다고는 말한다)
 
그리고 이제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주변에서 기독교 포교활동이 엄청나게 몰려온다.
처음에는 단순히 흥미롭다. 왜냐면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꼬시는 거기 때문에 ㅋㅋ 재밌는 이야기처럼 말을 건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놀이터 정글짐에서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데
어떤 아줌마가 책갈피라면서 예수님이 그려진 코팅된 종이를 주고 갔다.
그림 밑에는
 
다음 중 예수님이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1. 동물
2. 노인
3. 어린아이
등등
뭐 이런 게 써져 있었고 뒷면에 정답은 전부 다랍니다 호호 이런 거였다.
전부 다겠지 뭐!  라고 말하면서 뒷면을 봤던 기억이 난다.ㅋㅋㅋㅋㅋ(이미 몇 번 교회 끌려가서 얘기 듣고 온 애
그리고 모태신앙인 친구들도 꽤 있어서, 친구가 '우리 교회 놀러 올래? 맛있는 것도 주고 놀이터도 있어!'
라고 말하면 나는
오 ㄹㅇ? 하고 신나게 따라갔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달란트 시장? 누구보다 즐김.
그러다 거의 세 달인가를 일욜마다 연속으로 교회를 간 적이 있는데 아빠가 되게 싫어했던 기억이 남..
그러고 나서 뭐 아마 자연스럽게 교회가 질려서 탈주했다. (성경책 얘기가 길어짊과 동시에 흥미 잃은 듯?
그 당시에 나는 성경 얘기를 재밌는 새로운 소설 정도로 취급했었던 것 같다.
 
아무튼 누군가가 신은 없어 종교 믿지 마!라고 한 적도 딱히 없고
오히려 종교와 가까운 삶이라면 삶이었으나
(심지어 중고등학교 기독교 미션스쿨이었고 관련 수업도 많았다.....)
정말 단순히 표현하자면 어쨌든 나는 무교다.
 
그래서 말하고 싶었던 것
: 종교적 사상에 관한 영역은 외부의 환경이나 시대적 세계관(에피스테메) 보다는 개인의 기질과 생각이라는 내부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 않을까? 라고 말한 이유는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신이 있다고 말한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딱히 혐오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 물론 지극히 일반적이고 소위 건전한 종교생활의 경우.
다만 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러셀은 결코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자는 아니었다. 
그가 종교 자체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종교가 자신과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는 것을 정당화시키기 때문이라는 데 있었다."
 
같은 생각이다.
 
그리고 무신론 관련해서 반박하는 말 중에 흔히 볼 수 있는 말이 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신이 있음을 인정하는 거라고.
 
하.... 똑같이 언어적으로 넘길 수도 있긴 하지만 내 생각을 써보자면
기본적으로 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동의한다.
귀찮으니 쉽게 말하면 >존재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러셀의 말을 빌려서, '증거가 불충분합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것에 동의한다.
따라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나츠메 우인장이라는 애니에서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츠유카미라는 신을 모시는 작은 사당이 나오는데, 그 신은 몸집이 매우 작고 힘도 약하게 묘사된다.
과거에는 아무래도 농사 때문에 비를 내리게 하는 신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받들어져 크기도 크고 힘도 강했는데,
점차 츠유카미를 받드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그 신에 대한 믿음 또한 사라지게 되면서 약해진 것이다.
과거 어린 시절부터 참배하러 오던 한 늙은이의 신앙에 의해 존재는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사람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츠유카미는 사라진다.
 
신을 믿는 사람이 소멸했기에 신 또한 소멸한 것이다.

> 나는 이런 의미에서는 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일 뿐이지 특정 신을 믿고 따르겠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일단 애초에 신과 종교를 분리해서 바라보고 있다.
 
저 에피소드를 보면서 눈물도 좔좔 흘렸다.ㅋㅋ
신을 믿지 않는다고 신을 주제로 한 이야기는 무조건 다 배척하고 감동도 못 느끼는 사람은 아님..
신이라는 소재로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공감을 하며 감동받는다.
중요한 건 그 내용이 나에겐 사실이 아니라 '비유적'이라는 것이다.
 
러셀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돌았을 때 어느 종교 신문에서는 이렇게 보도했다고 한다.
'러셀의 죽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리라.'
ㅋㅋㅋㅋㅋㅋ
(숙연)
 
 
 
 "세상에는 종교를 등에 업은 폭력이 넘쳐 난다.
...
그렇지만 ‘종교적 믿음’은 이 모든 일에 면죄부를 준다.
과학적 상식에 한참 벗어나도 ‘종교적 믿음’은 존중받는다.
신체 일부를 잘라내는 할례도 종교 예식이므로 막지 못한다.
...
종교에는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 더 끔찍하다.
과학은 증거와 사례를 들이대며 무엇이 더 옳은지를 토론하게 하지만,
종교는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만 한다.
광신자들이 참혹한 짓을 저지르고도 거리낌이 없는 데는 이유가 있다."
 
 
 

 
-

 
 
 
 
 
"이 세계는 우주에 비하면 미세한 점에 불과하고, 인간의 삶도 찰나일 뿐이다. ……
인생은 투쟁이고 세계는 낯선 이를 위한 임시 수용소일 뿐이며, 죽음 뒤에 얻은 명성은 허무하다.
그런 우리에게 유일한 버팀목은 철학뿐이다. 철학은 우리 자신 속에 거룩한 정신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고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은 악이 아니라 우리의 운명일 뿐이라고 말해 준다. ……
우주적 이성에 따라 일어나는 일은 결코 나쁜 일일 리 없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이게 나를 허무함으로 이끄는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뭐.. 우주적 이성.. 로고스.. 그런 이유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특정 ^정신승리^에는 도움이 된다.
허무함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하고 매번 생각하는데..

결국 나의 가치다. 나의 기준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주며 원동력이 되어준다.
그 가치가 무엇인지 변화하는 현실에 맞춰 생각하는 자세와 동시에
양보할 수 없는 나만의 이상적인 가치도 꿈과 목표로써 존재해야만
어느 쪽의 결여로 인해 생기는 허무로 빠지는 구멍이 메꿔진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맞추어 지도를 고쳐 나가는 현실주의도,
미리 그려진 지도에 맞추어 현실을 바꾸는 이상주의도
나에겐 전부 필요하다.
 
 
현재 나의 현실과 이상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직업'..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일단 먹고살려면 사회생활을 하며 노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노동은 결국 나를 위한 노동이라고 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 산업사회는 노동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다.
예컨대 자기 땅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은 농부는 자신의 노동으로 키운 작물에서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노예는 다르다. 노예는 죽지 않기 위해 일하므로 노동은 그저 고통일 뿐이다.
산업사회는 사람들의 노동을 노예의 노동같이 만들어 버렸다.
노동자들이 생산한 물건은 대부분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살 수도 가질 수도 없다.
노동은 다만 생계를 위해 치러야 하는 고통일 뿐이다. 이런 뜻에서 인간은 노동에서 소외되어 있다."
 

그래서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는 이 뒤에 '이런 비인간화된 상황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사유 재산을 없애는 것' 이라고 덧붙였기 때문이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의 세계관은 또 다르기 때문이다.
 
그 노동자들이 생산한 물건은 현대에선 너무나도 범위가 다양하다.
소비 방식도 다양해졌다.
 
당장 스스로를 예로 들면
나는 현재 방송미술을 하고 있다. 세트장 머 그런 거 디자인하는 인간이다.
세트라는 공간을 내가 생산한 물건이라고 치면... 내가 세트를 쓰거나 사거나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가치와 결과물로 치환된다.
 
1. 내가 디자인했다는 사실이 남겨진다. 이러한 점에서는 생산품보다는 작품이라는 성격을 띠긴 함
2. 만들어낸 건 공간이지만, 영상물로써 노동의 결과물이 반영구적으로 남겨진다.
3. 나는 그 영상을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감상(소비)할 수 있다.
4. 촬영이 끝난 세트장은 바로 철거된다.
 
쨌든 내가 하고 있는 방송미술이라는 노동은 인간적/비인간적 노동의 범주로 나누기 애매하다.

쓰면서 문득 든 생각인데 현대의 에피스테메는 '경험의 가치' 같다.
 
경험이라는 단어 자체는 폭이 넓지만 어떤 뉘앙스냐면..
몇 년 전부터 ’상품이 아니라 경험을 디자인한다’라는 개념이 중요해지면서 유행을 타기 시작했고
이제는 거의 기본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러한 의미의 경험이다.
또한 나라 간의 문화적 경계가 없다시피 한 현대에선 당장 50년 전, 100년 전에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당연하게 경험할 수 있는 시대다.

경험의 가치가 중요한 세계관 속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 이
자연스레 중요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하기 싫은 일인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결국 좋은 경험으로 받아들여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자아실현으로 가는 좋은 경험으로 받아들여진다.
음..현대의 사람들은 그 ’좋은 경험’ 이라는 인식 아래에선 어느 정도의 고통을 참을 수 있는 것 같다.

사실 방송미술에 정이란 정은 다 털려서 전 직장을 그만뒀는데ㅋㅋㅋㅋ
방송미술이라는 것이 정답이 없는 일을 하는 것과 같아서
팀원들은 대부분 미술감독의 스타일과 방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정말….. 어마어마했다.
(정답 좋아하는 애가 어쩌다 방송미술을 하게 된 거냐)
회사에 가는 게 너무 싫어서 잠에 들기 직전까지 울고
출근하다가 차에 치여서 팔을 다치면 어쩔 수 없이 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맨날 했다.^^;
그렇지만 미워도 다시 한번이랍시고 다른 회사는 환경, 사람이 다르니 뭔가 다를 거라는 생각에..
한번 더 경험해 보고 판단하자 하면서 지금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경험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확실한 판단이 서면 언제라도 튈 준비는 되어있다.

내가 한때 입에 달고 산 말이 있다.
‘사명감이 갖고 싶다’
무언가 미치도록 하고 싶은 일이란 게 없어져 버린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사명감으로라도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

 
 

"그렇지만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가 함축하는 중요한 의미 하나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인간에 대한 극도의 혐오는 역설적으로 인간이면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높은 기대치에서 나온다는 점 말이다.
염세주의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비판 정신에 바탕을 두어야만 의미가 있다."

 
사실 나에게 나름 위로(?)가 되었던 역설이다.
그전에 이미 스스로 깨달았던 것이긴 한데,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대부분 엄청나게 긍정적인 감정에서 시작됐다.
 
애초에 나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넘쳐났었다ㅋㅋ
흠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도 모른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눈과 귀를 막아 버리는 게 아니라 매번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쓴다.
그게 사랑이지 뭐..
내가 살면서 조져진 걸 생각하면 이 스탠스는 집착광공이나 다름없다.
 
 
 
"키르케고르는 사람들이 절망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에 따라 절망의 정도를 나눈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자신이 절망에 빠져있음을 알지 못하는 절망'이다
...
이보다 나은 절망은 '자신이 절망하고 있음을 깨닫는 절망'이다.
...
내 삶을 절망에서 이끌어 낼 '믿음'은 어디 있을까? 기독교 신자인 키르케고르는 그 답을 신에 대한 믿음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서 구원을 찾을 수 있을까?"
 
 
 
믿음의 대상이 있고 구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 대상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어디서 누구를 믿으면 구원받을지어다'라는 말은 기괴하게 보인다.
믿음, 구원이라는 나름 거창해 보이는 단어와는 다르게 그 대상은 신에 비해 평범할 수도 있다.
누군가 나에게 '넌 무엇이 너의 삶을 절망에서 이끌어 내 주는 구원이니?'라고 묻는다면
 
"우리 집 고양이요"
 
라고 말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쩌면 아주 흔하고 보편적이고 당연한 건데
구체적으로 언제 느껴봤냐고 한다면 일단 말문이 막히곤 했다.
물론! 사랑이란 게 그 형태가 다양하긴 하지만..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은 사실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나에게 부모님의 사랑은 지금 말하는 사랑과는 다른 부류의 사랑이다)
첫사랑도 딱히 없다. 호감이라고 해야 맞다.
사귀었던 사람들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확실하게 사랑을 느꼈던 순간은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자다 깬 얼굴로 울면서 나오는 우리 집 고양이의 얼굴을 봤을 때다.
 
 
"마침내 구름이 걷히듯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왔다.
어떤 글을 읽다가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밀은 자신이 ‘결코 나무둥치나 돌덩이가 아니며, 여전히 내면의 감정이 살아 있음을 깨닫고’
정신적 위기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된다.
  그 뒤 밀은 전과는 아주 달랐다.
이제 그는, 삶은 결코 논리와 이성적인 분석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감정과 정서의 소중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저 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기본 사고회로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리고 이런 과학적 사고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감정, 내면의 정신과 반대편에 서게 된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객관적인 수치와 함께 과학적인 증거를 대는 것이 무엇보다 가치 있다고 여겨지기도 하고,
이 과정에서 개인의 감정과 사고는 가치 없는 것으로 취급되어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의외로(?) '사랑'무새다.ㅋㅋㅋ
사람으로서 살아가려면 사랑이라는 감정은 정말 중요하다....
이 글을 내 주변인들이 본다면 니가?? 라고 하겠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후설은, 확실한 것은 객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내면에 있는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을 객관적이고 수치화된 세상에 끼워 맞추려는 과학 문명에 맞서,
주체적인 이성과 인간성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 점에서 그는 시대를 앞서간 철학자였다"
 
"게다가 과학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명목 아래 사물을 연구하듯 사람을 연구 대상으로 세우고 관찰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나와 상대방이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진정한 이해가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우리는 돌덩이가 아니다.
감정을 느끼고 사유하는 사람이다.
완벽하지도 않다. 불완전 그 자체다.
그런 존재가 과학적, 객관적인 것에 모든 가치를 걸면 어떻게 될지.. 모르면 돌덩이다.
 
인터스텔라가 내 인생 영화인 이유 중 하나가 그렇다.
과학문명과 사랑을... 개쩔게 (어휘력 부족) 버무렸다.
 
플라네테스라는 만화도 그렇다.
여주 이름이 심지어 타나베 '아이' 다.
닉값한다. 사랑무새다.
사랑타령이 가끔 너무 막연하게 낙관적으로 다가와서 답답할 때도 있는데,
결국 캐릭터가 전달하고자 하는 말은 전부 맞는 말이다.
 
 
그리고 모든 철학적 사유가 바라는 방향성 또한 결국 사랑으로 보였다.
나라와 세상이 망하길 빌면서,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길 바라면서,
모두를 해롭게 하는 진리를 찾으면서, 올바르지 않는 길로 이끌기 위해서,
사색에 빠지고 고민하고 이론을 철저하게 정리하는 사람이 있을까..?
 
 
"철학의 역사란 결국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진리로 향해 가는 여정이다."
 
 
 
 
-
 
 
 
 
다음 번엔 현대 철학 쪽을 봐야겠다.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디서 살 것인가  (1) 2023.05.12
이방인  (0) 2023.04.24
욕망을 발견하는 철학  (2) 2023.04.19
MBTI 검사 또 해봄  (0) 2023.04.02
mgram 성격유형검사 해봄  (0) 2023.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