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각

어디서 살 것인가

by 라라쿠쿠 2023. 5. 12.

[어디서 살 것인가 - 유현준]

 

사실 아직 다 안 읽었는데

생각이 많아져서 중간에 끊고 쓰는 글

 

 

 

우선 이 책이 재밌는 점은

>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건축(공간)과 연결 지어서 풀어낸다. <

 

 

"건축물의 의미는 사용자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를 배제하고 그 건축물을 이해하거나 평가하기는 어렵다. 사람과 건축은 불가분의 관계다.

이는 마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전에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다른 별개의 무엇이라고 생각했다가

상대성이론 이후에는 시간과 공간이 연결된 ‘시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과 비슷하다.

이제 시간과 공간은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 어려운 하나로 연결된 개념이다.

건축과 사람도 마찬가지다.

건축과 사람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상호 영향을 주면서 의미를 규정한다."

 

 

시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과 같이

건축, 공간과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공간디자인을 전공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공간이란 사람의 삶과 가장 밀접한 요소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만큼 근본적인 탐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 학교 건축은 교도소다

 

 

"양계장 같은 학교에서 12년 동안 커 온 아이들에게 졸업한 다음에 창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닭으로 키우고 독수리처럼 날라고 하는 격이다.

대형 학교 건물 안의 똑같은 교실, 숫자만 다른 3학년 4반에서 커 온 아이들은

대형 아파트의 304호에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그런 곳에서 살다가 나중에 똑같은 납골당에 나란히 안치될 것이다."

 

 

학교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떠올리면 4-5층 정도의 가로로 긴 건물, 운동장, 운동장을 둘러싼 담장과 교문이 떠오른다.

솔직히 예외는 없다. 그냥 학교란 원래 이렇게 짓도록 정해진 것처럼 머릿속에 콕 박혀있다.

이는 교도소와 공간 구성상 차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공간에서 아이들은 12년 동안 생활한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교실에서 자라나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창의적인 아이들을 기형적인 공간을 통해서 점점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들이 왜 창의적이지 않지?” 하면서 아이들을 창의력 학원에 보내고 창의력 학습지를 풀게 한다.

우리의 학교에는 3미터가 넘는 경사 지붕의 교실도 있어야 하고 둥그런 천장의 교실도 있어야 한다.

아이들이 다양한 모양의 천장이 있는 교실에서 공부하고 생각하게 해야 한다."

 

 

당장 학교 교실 천장만 생각해 봐도 그 갈매기... 천장 텍스가 떠오를 것이다.

가끔 추억의 밈으로 공감을 유발하기도 하는데

사실 잘 생각해 보면 무섭긴 하다.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천장을 보며 공부했다니ㅋㅋ

나는 교육부가 교실 천장을 2.6m로 지정해 놓은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이들은 공평과 평등이라는 이유로 모두가 똑같은 공간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인 학교 건축물을 양산하고 있다. 평등과 전체주의는 종이 한 장 차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목적은 숭고하나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

이들은 평등을 획일화를 통해 이루려 한다. 평등은 다양성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 "

 

 

똑같은 것이 당연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라난다.

 

내 학창 시절만 해도 많은 예시들이 떠오른다.

종종 교복치마가 불편해서 교복바지로 맞춰 입는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은 또 시선이 많이 달라졌지만, 내가 중고등학생 때만 해도 교복 바지를 입는 것이 남자 같다며 손가락질을 받고는 했다.

그 당시에 유행하던 가방이나 외투를 남들과 똑같이 입지 않으면 소위 '못 나가는' '찐따' 같다는 소리를 해댔다.

 

 

"학교 건물은 저층화되고 분절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10분의 쉬는 시간 동안 4층을 내려가서 바깥공기를 쐬고 다시 4층을 올라가야 하는 학교의 구조는..

그냥 실내, 교실 안에 있으라는 소리다.

교육부 사람들은 '아이들이 복도에서라도 뛰어놀 수 있게 복도를 넓혀줘야죠'라고 한다.

밖으로 내보낼 생각은 하지 않는다.ㅋㅋ

 

학교는 다른 층 다른 교실에 있는 친구들과 우연히라도 자주 마주치거나,

뻥 뚫린 공간에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공간구조다.

 

따라서 학교 건물은 저층화되고 분절되어야 한다.

 

그러나 작가가 이와 같은 학교 디자인 안을 공모전에 출품했을 때

심사위원 여덟 명 중 네 명은 끝까지 새로운 학교 디자인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실내 면적을 줄이고 다양한 외부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관계자들을 설득하자, 그다음으로 돌아오는 말은

'좋은 줄은 알겠는데 우리는 공립학교이기 때문에 어느 한 학교만 좋아지면 형평성이 깨져서 안 된다'

라는 논리였다.

그들만의 고착된 심사기준은 변화하지 않는 학교 건축을 만들었다.

교육부의 공립학교는 심지어 관할 행정구역에서 건축 허가를 받지 않고 교육부의 허가를 받는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학교 건축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의 학교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도전정신이 없고 전체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는 국민만 양산할 것이다."

 

 

사실 현재의 교육과정과 학교 건축이 고착되기까지 100년도 되지 않았다.

이것이 절대적인 정답이다 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다.

학교란 기성세대만의 입장과 시선보다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자라는 환경을 생각한 공간이 조성되어야 한다.

교무실이 1층이 아니라, 밖으로 바로 뛰쳐나갈 수 있는 교실이 1층이어야 한다.

교사들의 자가용을 주차하기 위한 지하주차장을 만들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외부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저층화되고 분절된, 마을과 같은 공간을 생각하다 보니 좋은 예시가 떠올랐다.

학교는 아니고 유치원이긴 하지만 ㅎㅎ

 

 

 

일본 도쿄에 있는 후지 유치원이다.

건축가 테즈카 타카하루가 설계한 유치원인데, '하나의 마을을 만든다'라는 생각으로 지었다고 한다.

 

도넛형의 독특한 건축 형태에서 아이들은 마음껏 빙글빙글 뛰어다닌다.

중정형태의 가운데 마당은 교실들과 바로 접해있어서 접근성이 아주 좋고,

어느 교실에서나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이 보인다.

 

 

건물 옥상을 관통해서 심어진 나무들은 아이들이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밧줄도 달려있다.

또한 옥상 바닥에는 여러 채의 천창도 있는데, 아이들이 아래위로 쳐다보면서 놀게 하기 위함이다.

 

 

유치원은 아무래도 '놀이공간'에 초점이 좀 더 맞춰지다 보니 이렇게 틀을 깨는 디자인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중고등학교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교는 성인이 되기 전 12년 동안 개개인의 가치관 형성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런 공간이 교도소와 같은 형태가 되선 안된다.

 

 

 

 

 

 

2. 표정 없는 아파트

 

 

 

본가 베란다에서 보는 아파트 뒤쪽 풍경은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그냥 정말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그러다 대기업 공장이 들어선다는 계획이 나오면서 순식간에 그 황무지는 온갖 아파트와 상업시설로 가득 찼다.

그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배나무밭이었던 넓은 땅들은 어느샌가 높은 아파트들이 올라와 있었다.

대학생 때 내려와서 본 풍경이니, 5년도 안 되는 사이에 그렇게 바뀐 것이었다.

그 풍경을 보면서 나는 뭔가 무섭기도 하고 징그럽기도 했다.ㅋㅋ

 

 

 

"과거 주택의 마당은 특정 기능 없는 빈 공간이었다.

계절과 날씨가 바뀌면서 만들어지는 마당의 변화는 우리에게는 ‘생각이라는 빵’을 만들 때 필요한

밀가루나 버터 같은 재료였다. 변화는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

하지만 우리는 지금 마당 대신 아파트 거실의 변화 없는 인테리어 속에서

TV를 켜면 쏟아지는 정보에 질식하며 살고 있다."

 

 

 

나는 태어나서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어느 읍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살았다.

1-2층 짜리 주택이 골목길을 따라서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있었고, 그 옆에는 논과 밭이 있었다.

 

나에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집과 관련된 풍부한 추억은 시골 주택에 살았을 때뿐이다.

 

만들어진 놀이터가 따로 없으니 집안 곳곳, 마당 곳곳, 나가서  골목길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없는 놀이를 만들어내며 놀았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던 마당 풍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봄에는 화단에 핀 꽃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여름에는 밤하늘을 보면서 텐트를 치고 자기도 했고

가을에는 낙엽을 직접 내 키만 한 빗자루로 쓸기도 했고

겨울에는 눈으로 미끄럼틀을 만들어 놀았다. 

 

마당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으면

창고 옥상(명칭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음)에서 빨래를 널던 엄마가 보면서

자전거 선수해도 되겠네 하고 말해주던 게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살던 주택은 '우리 집'이라는 감정적인 연결이 아주아주 강했다.

 

그러다 학교 진학 문제 때문에 시내로 가게 되면서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처음에는 단순히 나의 개인방이 생긴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아파트로 간 뒤로 그 집과 관련된 추억이 정말 하나도 없다.

'우리 집'이라는 느낌보다 'xx아파트 xxx호'라는 느낌이 강했다.

 

 

골목길에서 우연찮게 동네친구를 만나 놀 일도 없었고,

누구야 놀자 하면서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고,

플라스틱으로 똑같이 뽑아낸 양산형 놀이터에서 똑같은 짓을 하면서 놀았다.

집에 들어오면 거실에 앉아 TV를 보는 것이 일상이었다.

 

 

 

"마당 주변으로 있는 사이 공간인 툇마루와 대청마루 덕분에 마당에 서 있어도 따뜻한 느낌을 받게 된다.

현대 도시에서 이 사이 공간의 역할은 발코니가 한다.

발코니에 널린 빨래나 그 위에서 쉬는 사람들의 풍경이 도시의 얼굴을 따뜻하게 해 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발코니 확장법’ 때문에 발코니가 멸종됐다.

그래서 더 이상 건물의 표정이 없다. 마스크를 쓴 사람 얼굴 같은 유리창만 있다."

 

 

현대의 아파트들은 표정이 없다.

굳이 있다면 어떻게든 간지 나는 정문을 만들려는.. 보톡스 맞고 올라간 입꼬리처럼 생긴 표정만 있다.

70-90년대 주택들만 봐도 표정이 엄청나게 다양하고 재미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집'이라는 표현보다는 'xx아파트'에 산다고 표현하며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요즘 자기소개할 때 어디 아파트 산다고 하는 거 보고 기괴함을 느낀다)

 

12년을 똑같은 양계장에서 지내고 나왔더니,

이번에는 표정 없는 건물 속 수많은 똑같은 공간들 중 한 공간을 차지하려고 돈을 모은다.

그렇게 아파트에 들어가서 자녀를 낳으면 이 과정이 자녀에게 또 되풀이된다.

 

아파트는 점점 더 높아져만 가고, 외부 공간에 대한 접근성은 점점 더 떨어진다.

특히 나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안타깝다.

물론 정말 소수의 아파트는 그나마 좀 다른 놀이터를 조성을 해놓긴 하던데,

대부분은 보호라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통제하려는 구조의 놀이터다.

 

 

 

여기서 내가 좋아하는 독일의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히를 슬쩍 가져와봄

 

 

 

딱 봐도 '한국 놀이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과는 전혀 다른 디자인들이다.

그리고 재료부터가 다양하다.

 

귄터 벨치히는 '진짜 놀이는 아이들 스스로 만든다' 고 말한다.

그것이 창의적이고 즉흥적인 아이들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놀이터에서 옥상탈출 놀이 하면서 이리저리 기괴하게 매달렸던 거 생각하면.....)

따라서 지나치게 안전하고 지나치게 통제된 놀이터는 나쁜 놀이터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의 인상적인 관점은 '떨어지도록 놔두면 떨어지지 않는다' 이다.

어느 정도 위험을 허용하며, 아이들이 그 놀이터 안에서 자신이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가능성, 욕구, 한계를 깨닫는 동시에 어떤 실수를 해도 괜찮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아파트로 이사 오고 나서는 나도 똑같은 플라스틱 놀이터에서 놀았지만,

유년시절 시골에서 마음껏 뛰어놀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고 소중한 추억이다.

시골 = 귄터 벨치히가 지향하는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물론ㅋㅋㅋ 엄청 넘어지고 많이 다치기도 했다 ㅋㅋㅋㅋㅋ

킥보드 타다가 내리막길에서 크게 슬라이딩도 해보고

자전거 타다가 논에 빠져도 보고..

넘어져서 울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동네어른들이 소리를 듣고 나오셔서 집에 데려다주곤 했다ㅋㅋㅋㅋㅋㅋ

 

난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깨닫는 것들이 훨씬 더 많았던 것 같다.

나중에 정말 만약에..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적어도 아이의 어린 시절은 내가 자란 시골 주택과 같은 환경에서 자라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3. 매력적이지 않은 서울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이다.ㅋㅋㅋㅋ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과를 달성하려는 보편적인 한국인의 사고방식이 들어있기도 하고

'서울'이라는 공간이 성공의 기준으로써 누구에게나 적용시키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매력적인 공간들도 분명 존재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나는 서울을 매력적인 도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 서울의 공간들은 너무 흩어져 있다.

이 말은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규모에 비해 매력적인 외부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만큼 개인의 공간은 줄어든다.

그만큼 '공공 공간'이 더욱더 필요해진다.

 

그러나 수치로 살펴보면,

뉴욕 맨해튼의 경우 10km 내에 10개의 공원이 배치되어 있다.

그 공원들은 평균 1.04km 정도 떨어져 있고 공원 간 보행자 평균 이동 시간은 13.7분이다.

 

그리고 서울의 경우 15km 내에 공원이 9개 있다.

공원 간의 평균 거리는 4.02km이고 보행자 이동 시간은 1시간이다.

 

서울에서 공원이라는 공간이 삶과 얼마나 밀접하지 않은지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어디든 '걸어서' 갈 수 있는가 이다.

대중교통, 자가용이 아니라 걸어서 마음대로 편하게 매력적인 공간에 갈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교통기관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경험은 연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골목길의 옆집 친구 집에 갈 때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른 층의 친구에게 갈 때의 느낌은 다르다.

우리 중 누구도 ‘우울한데 엘리베이터나 타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우리 도시에는 보행자 중심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가 필요한 것이다.

경험은 연속되어야 하는데, 실내에선 단절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급진적으로 발전했고, 땅덩어리가 좁은 곳이라고 하더라도

매력적인 공공 공간을 어떻게 해서든 확보해야만 한다.

돈 많은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무료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공 공간이 더욱더 필요하다.

너도나도 똑같은 건물을 짓고 똑같은 상업시설을 넣고 월세를 내놓는 공간이 모인 도시가 매력적 일리 없다.

 

넓고 윤택한 도로가 효율적이고 빠른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여겨온 서울은 보행자의 공간이 점점 더 줄어들어왔다.

과거 이웃들과 만나고 친구와 함께 놀았던 '골목길'이라는 공간은

현재는 그저 '주차 공간'이 되었다.

 

 

제한된 도시 공간 속에서 윤택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변화하는 거주형태와

사적 공간, 공적 공간의 황금 비율을 찾아야 한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한 곳에 오랫동안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농사를 짓기 시작한 9천 년 전부터고,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꼭 다니기 시작한 것도 백 년 남짓한 삶의 형태다.

그 이전에는 수십만 년 동안 수렵 채집을 하면서 이동하면서 살았던 게 인간이다."

 

 

요즘 들어 '서울' 이라는 공간에 회의감이 자주 든다.

나는 대학생활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직장생활까지 10년 가까이 서울에서 살고 있다.

물론 애초에 목표로 했던 것들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평생 이렇게 살 거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현대인들은 보통 자신의 직장에 맞춰 어디서 살 것인지 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 평생직장이라는 단어가 희미해져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재택근무로 할 수 있는 직업은 굳이 직장에 맞춰 살 곳을 정하지 않아도 된다.

 

학교, 직장과 같은 현실적인 조건을 따지기 이전에,

스스로 능동적인 태도로 '어디서 살 것인가'를 고민해 본 적이 있었나 싶다.

여기서 어디서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은 내가 어디서 살고 싶은지에 대한 순수한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의 문제점을 바라보고 변화시켜야 하는 방향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사람과 공간, 건축은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하며 의미를 규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더 많이 이미 규정된 공간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서 살아야 의미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진다...

 

 

 

 

 

-

 

이제 다시 나머지 읽어야지ㅎ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입사를 했다 ㅋㅋㅋㅋㅋㅋ  (1) 2023.09.30
퇴사를 했다.  (0) 2023.08.31
이방인  (0) 2023.04.24
욕망을 발견하는 철학  (2) 2023.04.19
서양 철학사 후루룩  (1) 2023.04.10